행복을 찾아서

따수와를 탄생시킨 따수운 마음들의 이야기

October 6, 2020

1. 구 파트 동료들

구 파트 동료들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 사이를 미운 정 고운 정이 틈없이 메우고 있는, 단단히 잘 다져진 깊은 애정이다. 때로는 일하기 싫어도, 회사 가는 일만은 싫지 않았던 것은 모두 다 동료들 덕분이었다.

작년 여름의 일이었다.그 유별난 돈독함은ㅡ 집에서 가져온 맛있는 감자를 한번 맛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또 좋은 마음에는 스스럼이 없는 나는, 뜬금없이 생감자를(ㅋㅋㅋㅋ) 그것도 그냥 하나씩을(ㅋㅋㅋㅋ) 지퍼백에다 담아 출근길에 챙겼다. 그리고 하하호호하며 나눠주었다.

2. P 선배님

다음날 P선배님이, 이런 감자는 처음이라며 혹시 부모님께서 팔 생각이 있으신지 물어오셨다. 감자를 팔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팔려고 기른 게 아니라 먹으려고 길렀기 때문이다. 선배님은 허둥지둥하는 나를 위해 가격 책정도 도와주시고, 친정집에 보낼 감자도 함께 주문해주셨다. 그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었다.

엄마의 땡큐 레터 ('읍니다' !?)

그런데 선배님께서 보내주신 사진 한 장이, 나를 조금 진지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땡큐 레터였다. 익숙한 일들과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대부분인 엄마의 일상에, 새로운 일과 낯선 고객님이 등장한 것이었다. 그건 우리 부모님처럼 시골에 거주하면서 어르신 연령이 된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귀한 기회다. 그리고 엄마는 은연중에 그걸 반갑게 여기셨던 게 분명했다.

3. 부모님

터울이 많이 지는 오남매 중 하나로 성장하면서, 세대가 다른 형제들과 인생의 다른 단계를 각각 거치며 살아왔다. 넷째라는 순서는, 내 나이를 앞서간 형제들의 삶을 배우며 더 마음에 드는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부모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나 역시 언젠가는 부모님의 나이에 이르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언제 행복해하는지 관심이 많고, 또 가능하다면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 자체로도 내게 행복한 일이고, 또 나 자신의 행복에도 좋은 참고가 될 테니까.

첫 황혼의 허니문 - 제주도 (2019)

작년은 아빠가 칠순이 되는 해였고, 오랫동안 구상했던 <황혼의 허니문> 프로젝트를 실행한 해이기도 했다. 결혼 당시 신혼여행을 못 가신 부모님을 위해, 넷째딸과 함께 황혼의 나이에 떠나는 신혼여행을 콘셉트로 한 여행이었다. 철저하게 가이드 역할에 충실했고 부모님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확실히 내게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너무나 비일상적이라, 거기서 비롯한 행복이 일상에까지 옮아오기란 어려웠다. 그리고 비일상은 말그대로 일상의 누적분에 비례하여 임팩트가 커지므로, 무턱대고 빈도를 늘린다고 해서 행복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마침 좀더 일상적인 이벤트가 있었으면 하던 차였다.

4. 동기 K

작년 늦가을에 코딩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했는데, 마지막 과제가 자기 기획을 직접 개발하는 것이었다. 나는 간단한 웹 게임을 만들었는데, 그 때 '할 줄 모르거나 잘 못하더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만 강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ㅋㅋㅋㅋ) 그래서, 감자 외 판매 가능한 것, 브랜드 네임과 스토리 등등을 고심하던 것이, 일단은 뭐라도 한번 만들어볼까?가 되었고, 워드프레스를 이용해 간단하게 고춧가루 소개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한 팔로워수를 가진 내 인스타그램에다 잠시 올려보았다.

http://ddasoowa.wordpress.com

따수와는 애초에 부모님께 추가적인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뜻밖의 풍년으로 못 먹고 시드는 제철 야채들이 아까우니 판매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반면 고춧가루는 이미 부모님이 매년 판매해오시던 농산물로, 따수와가 아니어도 팔릴 것이었다. 품질이 좋아 가격도 비싼 편에 속한다. 게다가 판매 단위도 '근'으로 표기했다. (ㅋㅋㅋㅋ) 따라서 이 페이지가 실제로 어떤 구매를 일으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부모님과의 소통 / 농산물 사진 촬영 / 소개글 작성 등 만드는 과정 자체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동기 K 가, 무려 10근을 사고 싶다며 연락을 해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10근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고 되물었지만, 어머니께서 사시는 거였다. 그렇게 K 는, 내가 후다닥 만든 고춧가루 소개 페이지를 계기로 하여, 고춧가루도 사고 들기름도 샀다. 어머니께서 고춧가루가 너무 좋다셨다며, 또 들기름과는 사랑에 빠지셨다는 메시지를 읽고,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고 또 신기했다.

5. 고마운 분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올해가 왔다. 유례없는 긴 장마와 태풍이 몰려왔지만, 운좋게도 우리 논밭은 멀쩡하고 나는 올해도 집에 가서 신나게 감자를 캤다. P 선배님은 감자 세 상자와 들기름 다섯병을 사셨고, 동기 K의 어머니께선 마늘 한 접을 사셨다. 우리 집 감자를 맛보신 J 님의 지인 분은 아이다호 감자보다도 더 맛있다고 하셨단다. 그동안 팔고나면 끝이었던 부모님은, 이런 후기나 인증샷을 받아보실 때마다 매번 즐거워 하신다.

들기름 배달갔더니 P 선배님이 이런 간식상을 ㅜㅜ

구입과 판매의 용이성도 그렇지만, 나는 꼭 고객님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따수와를 통해 농산물을 구매하실 때, 부모님은 지불해주시는 금액 이상의 어떤 것을 함께 전해받는다고. 폭 터지는 웃음으로, 가벼운 압박으로, 뿌듯한 기쁨으로 전해져 우리 가족의 일상 속 행복의 씨앗들에게 양분이 되어준다고.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집 농산물로 만든 맛있는 요리가 놓인 식탁에 둘러앉은 여러분의 가족도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이다. :) 

/

*. 꿍꿍이를 좋아하는 사람들

잠을 줄이고  할 일들의 틈새에다 꽂아넣어가며 따수와를 만들었다. 로고 디자인부터, 사진 촬영/보정은 물론이고, 제한된 예산(가격에 영향을 안 미치고 그냥 지출할 수 있는만큼) 안에서 뭘 사고 뭘 사지 말아야할지까지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난 너무 좋았다. 하나 하나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면서, 우선순위를 정립하고, 목표를 구체화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들이 모두 소중했다.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오로지 나 자신의 숙고 뿐이라니, 얼마나 근사한 두려움인지! 단, 로고 만큼은 가족 단톡방에서 투표로 결정했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모양의 로고, '따수와'라는 이름과 어울리게.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야지 생각한 건 작년 겨울부터였지만 거진 1년이 지나고 말았다. 이 사이트는 Webflow라는 템플릿 사이트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그럼에도 대단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글쓰는 걸 꽤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온갖 곳에 위치한 텍스트들을 수정하고 내용을 채워넣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막판에 도메인 연결하는 데 문제가 있어서 예상 외의 지출(연결하려던 도메인 주소로 인쇄를 해버려서, 수정 스티커 추가 구입을 생각했다)을 할 뻔 했는데, 언제나 내 꿍꿍이들을 응원해주는 남자친구가 해결해주었다. 정말 고마워!

나는 천성이 곧다거나 인품이 훌륭하다거나 그런 사람은 전혀 아니지만, 다행히도 골똘히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덕분에ㅡ 오래 깊이 고민한 뒤 촘촘한 필터를 거치며 남겨진 생각들이 가끔은 꽤 괜찮은 경우가 있다. 그걸 뾰족하게 만들고, 또 잘 감싸 담아낸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행복을 느낀다. <황혼의 허니문>이 그랬고, 지금 <따수와>도 그렇다. 다음 꿍꿍이는 나의 행복과 더불어 남의 행복을 함께 빚어내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 

Further Reading
No Blog Posts found.